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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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통일전쟁[편집]
당시는 통일된 이탈리아군이 없었기에 통일 찬성파로 나뉘는 사르데냐 왕국군과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을 포함한 친통일 진영 민병대와 통일 반대파로 나뉘는 오스트리아 제국군, 교황령 산하의 교황군, 양시칠리아 왕국군 간의 전쟁이였는데,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은 남다른 사기로 대부분 용맹하게 전투를 치뤘고 그 외에 지역 민병대도 그에 따랐으니 여기서 기록을 세운 군대는 대부분 사르데냐 왕국군이다.
1.1. 1866년 6월, 쿠스토자 전투?[편집]
20만의 이탈리아 육군은 알브레히트 대공이 인솔하는 오스트리아군 7만 5천명에게 대패.
1.2. 1866년 7월 리사섬 공략[편집]
첫 번째 출전 때는 해상에서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의 장황한 연설만으로 종료. 두 번째 출전 때는 리사섬을 유람 주유하고 종료. 이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부와 국내여론이 들끓어 비난을 받자 페르사노 제독은 「아직 우리 함대는 전투를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세 번째의 출전 때에야 마지못해 전투를 시작, 리사섬의 오스트리아 육군은 1개 연대 반의 병력에 80문의 구식포가 전부여서 이탈리아 해군도 승리를 낙관하고 함대 28척에서 4시간 동안 예비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해안포대의 반격에 페르사노 제독은 즉각 후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은 군함 32척을 동원하고 병력 26,000명을 상륙시키고나서 리사섬을 간신히 점령.
1.3. 1866년 7월 리사 해전?[편집]
상대인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포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이탈리아 해군은 함포의 성능, 장갑함의 수, 함정의 총 숫자와 배수량에서도 상대를 압도했지만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충각 전술에 의해 대패.
개전 직후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은 최신예 장갑함 「레디탈리아」에서 바로 며칠 전 간신히 함대에 편입해 훈련이 부족한 「아폰다토레」로 갈아탐.[7] 이 결과 단종진을 이루던 함열이 일시정지되고 선두함은 그대로 전진...함열은 분리되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트호프 제독은 횡진으로 목조함까지 포함해 전력 돌격.
오스트리아 해군은 목조함까지 싸웠지만 이탈리아 해군의 다른 함정들은 방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 측의 침몰은 0, 사망자는 178명. 그나마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해군 사상자는 장갑함을 따라 충각돌격을 실시한 목조함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 해군 측의 침몰은 3척, 사망자 약 800명.
함대의 양과 질, 모든 스펙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을 웃돈 이탈리아 해군은 구시대 전술에 대참패. 참고로 충각 전술이 유효하게 기능한 것은 이 해전이 최후. 게다가 「장갑함을 가라앉히려면 충각돌격이 제일!!」이라는 잘못된 전훈을 40년간 세계에 각인시킴. 상대인 테게트호프 제독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선 알아주는 명장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옆구리를 기습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2.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편집]
2.1. 아도와 전투?[편집]
아도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오는 오로모족 기병. 보다시피 아프리카 부족국 특유의 화려한 장식과 창과 방패로 중무장하였다.
기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2연패. 최종적으로는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6000명 가까운 사망자와 3천명의 포로를 낸 대패였음.
2.2.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편집]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 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3. 청나라 조차지 요구[편집]
청일전쟁 이후인 1899년, 서구 열강에게 수많은 항구를 조차당하고 해군도 전부 털려버려 ATM이 되어버린 청나라를 본 이탈리아는 열강들을 따라 한입 할 요량으로 군함 6척을 동원해 저장성 싼먼만의 조차를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청일전쟁 이래 열강이 호시탐탐 우리의 영토를 차지하려고 기회를 노리며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 이제는 소국까지 무분별하게 덤벼드니 힘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어떻게 국가를 지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 쓰러져가는 제국이었던 청나라까지 이탈리아를 대놓고 소국 취급하며 초강경으로 돌아섰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는 상단의 아드와 전투에서 탈탈 털리며 "유색인종에게도 진 나라"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청나라와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8]
이전까지 열강들에게 무력하게 돈과 땅을 내주던 청 조정의 대신들은 소국의 침공에 분개하며 대동단결해 전쟁까지 불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약 10개월동안 대치한 결과 이탈리아가 물러나며 이탈리아는 또다시 유색인종에게 패배했다.[9]
4.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참고로 아래의 전투들이 벌어진 시점은 1917년 미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한 이후이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탈, 니벨 공세의 실패와 프랑스군 항명사태, 제3차 이프르 전투의 패배로 인해 1917년은 말 그대로 연합군 최악의 해나 마찬가지로 미국이 참전했다는 것만으로는 연합군에게 유리한 해였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게다가 빠르게 수를 늘린 반작용 때문에 이 당시 미군은 말만 군대인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파병 이후 한동안 유럽 대륙의 전장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군에 크게 의존했다. 미군이 조금씩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봄부터이나 그 당시에도 경험이 적었고 전쟁장비들 역시 부족했기 때문에 전쟁 막바지 백일공세 시점에 가서야 미군의 위용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즉, 러시아가 빠진 자리를 미국이 완전히 메우는 데는 1년 이상이나 걸렸다는 이야기.
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주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탈리아보다 체급이 더 큰 국가이기는 했지만,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수행하던 중이라 전선이 하나뿐인 이탈리아보다 꼭 유리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1차 대전기 이탈리아 왕국군은 훗날 2차 대전에 비하면 열심히 싸운 군대로 인식하는 편이다.
4.1. 카포레토 회전[10][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카포레토 회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대패해 3주간 150km를 패주했다.
오스트리아-항가리군은 전사 및 부상을 포함한 사상자가 2만 3천명이 나왔지만, 이탈리아군은 사망자 1만명, 부상자 2만명, 포로 26만 5천명이 나왔다. 이 전투에 참가한 이탈리아군이 대략 4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전투에서 70%를 날려 먹은 셈이다. 이 피해와 별개로 이탈리아군에서는 35만 명에 달하는 전선이탈자가 발생하였다.
4.2. 1917년 10월, 크라곤자 산 전투[편집]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의 톨마인지방, 크라곤자-마타주르-스톨 3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산맥에 걸쳐 총 5개 연대가 방어선을 치고있었다. 정신나간 독일군 대대장 1명이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이 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불과 이틀 반만에 독일군의 1개 대대에게 이탈리아군 5개 연대가 격파당하고 장교 150명을 포함해 9000명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3개의 산, 6개의 고지를 점령당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30명.
그리고 이 정신나간 독일군 대대장의 정체는 훗날 사막의 여우라 불리게 되는 에르빈 롬멜 중위였다.
4.3. 1918년 10월 경, 피아베 강 전투?[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휴전 교섭 중 이탈리아군은 이 틈을 노려 피아베 강을 넘어 공세로 나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격퇴.
4.4.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편집]
휴전 발효 후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30만의 포로를 획득.
5.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편집]
5.1.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편집]
항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침공전에도 불구하고 전투 초기에는 패배를 당해 전군이 포위되거나 전선이 붕괴되었다. 그때마다 이탈리아군을 구한 것은 바로 독가스.. 이탈리아군은 핀치로 몰릴 때마다 독가스로 형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독가스 살포에 뒤잇는 독가스 살포로 어떻게든 억지로 승리. 참고로 이탈리아는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협약에 가입한 상태였다.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의 장비는 오직 소총만으로 심지어 구식 머스킷도 현역(…) 기병은 창(…)이 무장이었다고 함.[12] 또한 공무원을 급히 모아 편성한 군대에게조차 이탈리아군은 질뻔한 것이다.
5.2. 1935년 10월[편집]
당초는 에티오피아군의 후퇴 전술도 있어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진군한 에티오피아군에 포위되어 덴베그이나 고개를 지키는 검은 셔츠 부대는 대부분의 야포와 전차를 버리고 패주, 마칼레의 보급기지까지 떠밀려 이탈리아군의 우익은 완패, 좌익의 보급기지까지 위협당해 총사령관인 바드리오 장군은 전멸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를 사용해 형세를 역전시키고 이후 전투 종료까지 독가스를 계속 사용했다.
여담으로 전쟁에 병력을 이리 쏟아부어서 느구서 너거스트를 망명하게 만드는거 까진 성공했지만 이탈리아가 패망할 때까지 친 하일레 셀라시에파 반군들을 소탕하지 못해(...) 에티오피아를 먹느니만 못한 상황이 됐다.
6. 스페인 내전[편집]
6.1.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전투?[편집]
마드리드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진군했지만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다수의 투항자를 내고 패주.
7.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영국의 삽화가인 Paule Loring의 1943년 4월 16일자 "히틀러 vs 무솔리니, 히틀러는 표류 중인 무솔리니를 자를까?(Will He Cut Him Adrift?)" 히틀러의 짐짝으로 전락한 무솔리니의 신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7.1. 1940년 6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편집]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하지만 단지 아돌프 히틀러의 전과를 질투한 무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그야말로 무지성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선적의 상선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선전포고 2개월 내 외양에 나가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버린다.
더 어처구니 없는건 영국과 프랑스에게 먼저 선전포고를 했지만, 어떤 작전도 명확히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11일간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물론 12일이 지나선...
7.2.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편집]
선전 포고를 시작한지 12일이 지나고(...) 이탈리아는 병력을 모아놓고 프랑스로 진격한다. 물론 당시 프랑스는 독일 국방군에게 유린되어 항복 직전인 프랑스에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불과 2개 사단도 안되는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프랑스의 항복이 좀 더 늦었다면 이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침공할 계획이었다.
전에는 이탈리아군이 전멸한게 아니라며[15] 이탈리아군의 승리를 주장하는 옹호글이 달려 있었지만 전투 자체는 이탈리아의 졸전이 맞았다. 프랑스군은 이탈리아군과 전투에서 압도적인 교환비를 거두었고 며칠 만에 프랑스가 항복해서 모양새 좋게 끝난 것이지 북프랑스의 독일군이 아니었다면 이탈리아전선은 정말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7.3. 몰타 항공전[편집]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 덕분에 추축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군단은 보급문제로 허덕이고, 결국 연합군의 반격을 허용해 괴멸된다. 원인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에 실패한 것이고 추축군이 몰타를 점령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크레타 섬 전투 덕분. 사실 몰타섬에는 전투기한대없이 대공포 조금이랑 경비대수준의 육군병력만 있어서,사실상 폭격기가 오면 바로 함락는데, 운 좋게도 몰타항공전 전에 항공모함에 실려야하는 복엽기 씨 글래디에이터 4대가 서류상의 실수로 몰타에 남겨졌다. 1대는 폭격으로 파손되어서 해체되었고 나머지 3기는 방공전에서 맹활약하며 Faith(신념), Hope(희망), Charity(자비)란 별명과 함께 사랑을 받게 됐다. 1대는 격추당하고 1대는 폭격으로 파손되어서 Faith 1대만 살아남았다.
7.4. 그리스 침공[편집]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로 인해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된다, 이탈리아는 21개 사단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리스군 13개 사단의 반격에 알바니아까지 후퇴해 붕괴직전까지 몰린다. 그리스는 친 독일적인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연합국측에 가담.[16] 결국 독일이 대신 전선에 뛰어들게되고 크레타 섬 전투로 인해 독일 공수부대는 더 이상 공수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덕분에 몰타라는 징검다리도 확보하지 못해 북아프리카의 롬멜 군단이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던 병력 일부를 발칸 반도 끄트머리까지 내려보내야 해 물자와 병력을 간헐적으로 소모시키고 소련에게 준비 시간을 조금 더 주게 되는 등, 단기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패배, 장기적으로는 추축국의 패망까지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독일군 참전 이후 잘 싸웠냐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문서를 직접 보자.[17]
여담으로 2018년에 유튜브에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을 조롱하는
7.5.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20][편집]
그 당시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던 이집트 왕국을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패주. 13만 명이 포로가 되고 이탈리아령인 키레나이카까지 잃는다.[21] 이탈리아가 무계획적으로 저지른 발칸과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구원하기 위해 독일은 발칸을 제압했고 아프리카 군단을 편성해 파견했고, 이 발칸 제압을 위해 바르바로사 작전 발동은 1개월이나 늦어졌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7,000대의 트럭이 보내졌는데(당시 동부전선 전체에서 1만 4000대밖에 없었음) 이것이 동부전선의 초기진격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22]
7.6. 타란토 공습?[편집]
영국해군 지중해 함대의 항모 HMS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페어리 소드피시 21기가 타란토항의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공격.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는 대파착저, 전함 리토리오, 카이오 두일리오 중파. 영국해군의 손해는 소드피시 뇌격기 2기.
7.6.1.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편집]
마타판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수상함대가 격돌. 이탈리아 해군은 중순 3척을 상실했지만 영국 해군의 손해는 전무.
7.7.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편집]
만약.. 요리라면 이탈리아가 영국을 이겼겠죠. 하지만 전쟁은 요리 대결이 아니었어요.
그러게 이탈리아는 그냥 피자나 파스타를 만들지 왜 전쟁을 했을까요? - 듀베르, 월드 오브 탱크 역사만화에서.
25만의 이탈리아군 병력은 영국군 3만 5천과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7.8. 1942년 12월 동부전선?[편집]
돈 강변에서 이탈리아 제8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바로 모든 병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바로 전달인 11월에 거의 비슷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훨씬 장비가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은 며칠간을 선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은... 무솔리니의 사위였던 갈레아초 치아노 이탈리아 외상[26] 이 자국군을 걱정하며 헤르만 괴링에게 "이탈리아군의 피해상황은 심각합니까?"고 묻자 괴링 왈..."전혀 없습니다.. 왜냐면...그들은 소련군 포화가 시작되자 바로 후방으로 뜀박질했기 때문이지요.."라고 했다.
7.9. 1943년 9월 보니파시오 해협?[편집]
1943년 9월 9일,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자 이탈리아 함대는 즉시 항복을 위해 연합군 점령지였던 몰타 섬으로 출항했다. 그런데 출항하자마자 들켜서 보니파시오 해협을 통과하려던 무렵 이들을 저지하려고 유유히 다가오던 독일 공군 소속 폭격기 Do 217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이탈리아 함대는 이들이 프리츠 X를 투하하기 직전까지 대공포 사격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결국 이 틈을 탄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했고, 이로 인해 리토리오급 전함 로마가 격침당하고 네임쉽 리토리오(이 당시에는 이탈리아로 개명된 상황이었다)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7.10. 1943년 9월 무솔리니 구출?[편집]
1943년 9월 12일 오후 2시,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이 지휘하는 무장 SS, 공군 혼성공수부대는 글라이더 12기에 나눠타고 바돌리오 장군의 신 정부에 의해 무솔리니가 감금된 그란 삿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착륙했다(착륙성공 8기). 이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적이 무장 SS란 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항복, 스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SS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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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차 이손초 전투라고도 한다.[2] 이집트 침공이 시작될 당시 이탈리아군은 지중해 너머의 그리스에서 개털리고 있었다.[3] 프로이센군은 보오전쟁 중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 왕국, 하노버 왕국, 헤센 선제후국 등 중소국가와 벌인 독일 본토 전역은 당연히(?) 석권하고 있었고, 작센 왕국과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두들겨 패면서 보헤미아로 진군 중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빈을 공격하면 오스트리아군이 급격하게 무너질 것을 기대하고 제안한 것이다.[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7년 이탈리아 원정 중 만토바 요새를 함락시킨 건 포위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오는 구원병력을 잡아먹고, 요새 병력을 굶겨서... 항복 받은 것이었고 실제로 만토바 요새는 나폴레옹조차 정면공격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5] 물론, 전력상의 우위가 승리를 항상 보장해주는 건 아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전력 우위가 정말로 달성됐다면 전쟁의 양상이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6] 다만 교황령 일부가 아직 프랑스 제국의 보호 아래 있었다. 교황령까지 접수하여 리소르지멘토가 완성되는 건 5년 뒤의 일.[7]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가장 치명적인 실책으로 본다.[8] 즉, 이탈리아는 다짜고짜 배 끌고 가서 땅 내놓으라 협박한 것(...) 심지어 준비도 매우 허술했다.[9] 출처 : 청말 해군의 중건과 해권(海權) 인식의 고양 -청일전쟁 이후를 중심으로, 조세현 / 중국 군벌 전쟁, 권성욱.[10] 12차 이손초 전투라고도 한다.[11] 독일어권이 아닌 타민족 징집병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항명하거나 탈영하기까지 했다. 이미 전투 중반 오스트리아 후방에서 체코를 포함한 다양한 국가들이 독립선언을 하며 들고 일어났기 때문.[12] 기병은 에티오피아의 실세인 암하라족과는 다른 민족인 오로모인으로 구성된 황실 근위대 기병으로 이탈리아군은 이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관습에 따라 반역죄로 성기를 자른다는 풍문을 믿어 갈라 기병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여러 의미에서의 죽음의 공포에 질린 이탈리아 병사의 단말마가 갈라 기병... 갈라 기병... 공포... 공포...였다고 한다. 이탈리아군에게서 노획한(...) 기관총도 있었다.[13] 게다가 그 악명높은 시베리아 부대다. 사보이아 기병연대와 같은 연대 규모. 근데 이 부대가 조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당한 거긴 하다.[14] 일반적으로 전쟁터에서 가장 널리 사용었으며, 현재까지도 화학탄의 주 원료로 남아있는 독가스다. 여기 들어간건 겨자 열매 추출물 같은게 아니라 염화수소 등을 합성해 만든 합성물질이다. 겨자 란 이름은 별명일 뿐. 설마 진짜 겨자열매 가스인줄 알고 반문에 달아놓은건 아니겠지[15] 얼마나 못 싸웠으면 유리한 교환비나 전황에서 재대로 이기지 못한 군을 전멸하지 않았다고 잘 싸웠다고 하는지...[16] 그리스 내에서도 메탁사스 총리를 비롯한 군부는 독일 유학파여서 친독 성향이 강했다. 그에 비해 귀족들과 요르요스 2세등 왕실은 친영파였다. 그래서 독일이 친독파를 구슬려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했는데, 무솔리니가 모든 걸 말아처먹었다.[17] 결론적으로 독일군이 그리스를 갈아버리며 맹활약하는 동안에도 전선을 밀어내기는 커녕 전면공세를 끝끝내 실패하는 바람에 독일군이 만든 돌파구까지 잘릴 뻔했다.(...)[18] 히틀러, 처칠, 스탈린, 그리고 이 문서에도 나와있는 무솔리니의 수 많은 삽질들(...)[19] 현재 해당 합성물을 만드는 앱은 공식 트위터를 통해 서비스 종료를 공지했다. 이 영상은 그 여파로 잠깐 역주행했던 것.[20] 이집트 침공이 시작될 당시 이탈리아군은 지중해 너머의 그리스에서 개털리고 있었다.[21] 오죽하면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이 너무 많이 항복해서 제발 그만 항복해!!라 했다 카더라..무적의 이탈리아 백기군단[22] 고전하던 남부집단군이나 보급로가 가장 길게 늘어졌던 북부집단군은 물론이고 선전하던 구데리안의 중부집단군도 보급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물론 북아프리카에 보낸 트럭이 왔다고 해도 라스푸티차를 비롯한 악천후에 문제가 생겼겠지만 트럭 보급 역량의 3분의 1을 까먹은 것 역시 무시못할 양인 것도 사실.[23] 이탈리아 또한 인간어뢰를 이용해서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2척을 항구에 주저앉게 만들기도 했다.[24] 영국은 이탈리아가 이걸로 겁먹고 최대한 활동을 안하길 원했다.[25] 에르빈 롬멜은 이때 몸이 좋지 않았으며, 전선이 무너저 포로가 될 수 있다고 본토로 소환한 뒤, 나름 능력이 있다고 본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상급대장을 대신 파견했다.[26] 훗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는 데 가담하였고 무솔리니가 오토 스코르체니에 의해 구출되어 괴뢰 정부 살로 공화국의 수장으로 복귀된 뒤 처형당했다.